[제2의인생]⑪키 170㎝·환갑 넘은 나이, 그는 어떻게 '패션모델' 됐나


흰머리가 희끗한 '시니어모델' 지망생들이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걸음을 내디딘다. 이곳은 국내 유명 백화점이 개최한 시니어모델 선발대회. '워킹 시험'을 보는 시니어 모델들은 보헤미안 스타일, 단아한 무용가 스타일 등 각양각색의 매력을 뽐냈다.

유효종씨(61)도 이 대회 참석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다른 지망생들에 비해 작은 키(170㎝)에 평범하게 어두운 색상의 수트 셋업을 입었다. 주목받기 힘들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심사위원들은 그가 매치한 투박한 '흰색 스니커즈'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심사위원이자 그보다 나이가 스무 살가량 어린 모델계 대선배 박세련씨는 "운동화 선택은 신의 한 수"라고 호평했다. 유 씨는 지원자 1500명 중 1등으로 선발됐다. 그를 뽑은 것은 유튜브를 통해 대회를 지켜본 젊은 학생들과 청년들이었다.

그렇다고 유 씨가 패피(패션피플)로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그 세대의 다른 남성들처럼 그도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아내가 사다 준 옷을 군말없이 입었다. 그랬던 그가 패션 감각을 갖춘 패션모델로 새롭게 태어났다.

◇아침 7시 반까지 출근하던 공무원이 패션모델 된 사연

최근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 지하 1층 카페에서 만난 유 씨는 멋스러운 검은 벨벳 재킷, 그 안에는 편안해 보이는 니트를 입고 등장했다.

그는 "원래 벨벳 재킷은 잘 안입는데 사진을 찍어야 할 수도 있으니 윗도리는 하나 걸쳐야겠고, 그렇다고 면접보듯이 너무 정장스럽게 입고 가진 말아야겠고…" 하면서 멋쩍어했다.

유 씨는 지난해 말 현대백화점이 개최한 60세 이상 시니어모델 선발대회에서 1등을 했다. 그 소감을 묻자 "누가 물어볼 때마다 아직도 어리둥절하다"고 답하면서도 "말할 수 없이 뿌듯하다"며 웃었다.

1983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체신부였던 시절부터 유 씨는 36년간 공무원 생활을 했다. 이 중 15여 년을 장관 연설문을 쓰고 언론을 상대하는 공보 업무를 맡았다.

멋스럽게 수염을 기르고 유머있게 이야기를 하는 유 씨가 어떻게 끼를 감추고 공직 사회에 적응했을까 싶었지만 그는 오히려 "공무원 체질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침 7시 반까지 출근하며 성실히 일했다"고 회상했다.

정년퇴직으로 공직 생활에 마침표를 찍으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제2의 인생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공무원이기 때문에 못 했던 것'을 찾던 중 고령화 시대를 맞아 등장한 '시니어모델'이라는 직군을 알게 됐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가 등록한 시니어모델 학원 수업에서 남성은 그가 유일했다고 한다. 당시는 시니어모델 붐이 일기 전이었다. 하지만 용기를 낸 덕분에 '블루오션'에 그가 먼저 뛰어들 수 있었다.

유 씨는 "나이 60을 먹고 자기가 주인공이 될 기회는 많지 않다. 자기 생일이나 딸 결혼식에서 손잡는 정도일까. 하지만 패션모델은 무대의 주인공이다.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정말 자긍심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시니어모델 시작하며 나이 드는 게 기대돼"

유 씨는 패션모델 일을 시작하면서 "나이 들어가는 게 기다려지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예전에는 나이 드는 게 싫었다. 약해 보이고 쓸모없어 보일까 봐. 그런데 패션모델은 멋있게 꾸미면 나이 들수록 돋보인다"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노인에 대한 인식도 바뀌고 있다. 예전에는 노인이 비교적 약하고 의존적이라고 인식됐지만 요즘에는 유 씨처럼 왕성하게 창조적 활동을 하는 노인이 증가하는 추세다.

과거의 노인의 개념과 차별화하기 위해 '액티브 시니어'(Active Senior)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은퇴 이후에도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도전하는 50~60대를 뜻하는 단어다.

유 씨는 "사회적인 시선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못 하는 것은 저희 윗세대까지다. 우리 세대는 그런 고정관념이 많이 없어졌다. '나도 꾸며가면서 자식에게도 투자하는' 정도의 중간세대"라며 '요즘 시니어'에 대해 설명했다.

고령화가 빨라지면서 국내 시니어 산업 시장 규모도 매년 성장하고 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연구에 따르면 2012년 27조원 수준이었던 고령화친화산업 시장 규모는 2015년 39조원으로 커졌으며, 올해는 73조원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시니어모델도 고령화 시대를 맞아 각광받는 산업이 됐다. 지난해 연세대학교에서는 '시니어모델을 통한 자아 재발견에 관한 근거이론'이라는 연구 논문을 발간하기도 했다.

경력 2~9년의 시니어모델 20명을 조사한 해당 논문은 "시니어모델을 하면서 이들은 새로운 자아를 발견했다"며 "이는 자기 삶의 중심을 되찾는 과정이며 성공적인 노화를 돕는 중요한 기회였다"고 평가했다.

유씨는 또래 시니어들에게는 '패피'가 되어 볼 것을 추천했다. 그는 "옷을 신경 써서 입으면 나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마음마저 늙으면 더 늙어 보인다. 다들 자신의 자긍심을 높이는데 신경 썼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유 씨는 현대백화점 온라인 채널 모델로 활동할 뿐만 아니라 서울우유, 이랜드패션, 종근당 등 다수 CF와 화보를 찍었다. 여러 영화에도 주·조·단역으로 연기 활동까지 하고 있다. 그는 "한국의 닉 우스터가 되는게 꿈"이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유 씨는 "공무원을 할 때는 자긍심은 있었지만 규정을 지켜야 했다. 지금은 얽매일 필요가 없다. 빨간 바지를 입어도 '쟤는 모델이니까'하고 용서된다. 앞으로 과감히 상상하고 원 없이 삶을 넓혀나갈 계획"이라며 웃었다.